하와이에서 찾은 우리 민족의 발자취 한인이민역사 115주년 특집

사탕수수밭이 있는 시간여행

하와이는 우리나라 미주 이민 역사의 첫 관문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담겨진 100년이 넘은 역사. 그 시간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하와이를 떠올리게 되고 고된 노동의 대가를 나눠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던 그 시절, 선조들의 마음을 그려보게 된다. 한 세기가 지나가는 동안 역경을 이기고 한민족의 뿌리를 내린 선조들의 노력과 그 정신을 이어받아 도약하고 있는 우리 미주 이민의 역사가 115주년을 맞이했다. 한인 이민 115주년, 그 뜻 깊은 시간들을 재조명해본다.
SUE SON 기자

미국으로의 첫 이민은 언제였을까?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자유로운 상호 방문과 경제활동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1885년~1888년 사이에 유학생, 외교관, 상인 등 약 50여명의 조선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정확한 기록이 남겨진 것은 본격적인 이민이 이루어진 2차 이민 때이다. 집단 이민이 이뤄진 2차 이주는 1903년부터 1905년 사이에 대부분 이뤄졌는데 당시 7,226명의 조선인이 하와이로 이민한 것으로 공식적인 수치가 남겨져 있다.

존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정한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1903년에는 하와이에 미주 최초의 한인 교회인 호놀룰루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한 한인들은 일본 고베에 도착 신체검사를 한 후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새벽 하와이 호놀룰루 제2부두에 도착했다. 이날을 하와이 첫 이민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대한제국이 '수민원'이라는 기관을 설립해 처음으로 추진한 공식 이민이기 때문이다. '수민원' 은 1902년 외국 여행권인 '집조(오늘날 여권)' 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궁내부 산하 관서로 최초의 해외 계약 이민이었던 '하와이 이민' 을 시작으로 지속적인 이민 사업과 관련한 여권 발급 업무를 하던 곳이다. 당시 하와이로 가는 첫 이민자들은 수민원 총재가 발급한 '집조' 를 갖고 떠났는데 '집조'는 한지 한장을 좌우로 나누어 왼쪽에는 여행인의 주소, 성명, 연령, 여행 목적 및 목적지와 보증인의 성명, 주소, 직업 등을 명기하고 소지자의 통행에 방해가 없도록 각국 관사에게 그 보호를 바란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이 내용을 영어와 불문으로 번역 해놓았다.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과 아시안들의 이민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를 모집해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특히 하와이나 피지쪽의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노예제가 금지된 이후 아시아에서 저임금의 노동자를 데려오고 있었다.

사탕수수는 열대 작물로 사탕수수에서 추출된 자당은 정제되어 설탕이나 당밀의 형태로 식재료로 사용되거나 발효시켜 에탄올이나 술을 만드는데 쓰인다. 또 오보에와 클라리넷, 색소폰, 백파이프 등 관악기들이 소리를 내는 데 필수적인 리드(Reed)를 만다는 주 재료로도 쓰이기 때문에 당시 산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물이었다. 특히 커피가 크게 유행하고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설탕을 생산하기 위한 사탕수수의 재배와 수확은 인력이 부족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는 '노동자 분리 정책'으로 노동자들을 관리했는데 이 때문에 여러 민족의 노동자 들이 서로 심한 경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가장 처음 들어온 아시안 노동자는 중국인으로 1852년에 3백여명의 중국인이 들어왔고 1882년에는 사탕수수 농장의 전체 노동자 10,243명의 절반인 5,037명으로기록되어 있다. 중국인 노동자가 많아지면서 일본 노동자가 대체되어 들어왔는데 일본인들은 1886년부터 진출하기 시작해 1890년에 12,610명, 1902년에는 31,029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73.5% 의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일본인 노동자가 많아지면서 일본인들은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는데 이들의 반발이 심해지면서 한국 노동자의 도입을 추진하게 되었다. 실제로 오하우 섬에 위치한 일루아 농장에서 일본인 노동자들이 파업 및 소요를 일으키자 각처에서 일하고 있던 한인 2백50명을 응급 조역으로 담당케 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고단한 삶 속에서 피어난 희망

하와이는 기후도 좋고 일거리도 많다.
숙소도 제공되고 치료비는 고용주가 부담한다.
어디든 학교가 있어 자식들을 가르칠 수 있다.
노동 시간은 매일 10시간이며 매주 하루씩 쉰다.
- 하와이 이민 모집 공고문 -

한국을 떠나오던 그날은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 나흘이었다. 제물포 항의 부두에는 세찬 바닷바람이 불고 있었고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의 마음은 추운 겨울 날씨 만큼이나 돌아오지 못할까 헤어짐의 아픔으로 더욱 춥게 느껴졌다고 한다.

실제의 고된 노동은 예상치도 못했고 가난과 추위에 힘든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날씨와 힘들지 않게 일하고 금화로 품삯을 받는 다는 그럴듯한 소문들이 이민을 결심하는데 한 몫 했다.

언어 뿐 아니라 음식과 문화까지도 모두 달랐던 곳에서의 삶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했다. 한인들은 숙소 근처에 채소를 심어 한식을 직접 만들어 먹으며 타지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고 고된 노동과 압박에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며 생활했다.

한인들은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잡초를 뽑고 사탕 수수 수확 시기에는 줄기를 자르는 일을 했다. 이파리들도 잘라내고 차곡차곡 쌓아 놓는 일, 물 대는 일 등 구분되어진 일을 나누어 했는데 쌓아놓은 사탕수수를 등에 지고 기차나 마차에 싣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6시부터 일을 시작해 오후 4시반까지 하루 10시간을 일했고 일요일은 쉬었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먼저 이민 와서 자리잡은 중국인과 일본인들의 민족 차별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1년 계약이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본토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하와이 이민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이민 지원이 끊어졌고 1907년 하와이 이민은 5년만에 중단 되었다.

낯선 땅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고향을 그리던 사람들. 그들은 그 퍽퍽한 삶 속에서도 한복을 입었고, 설날, 추석 등 고국의 명절을 지내는 등 한국의 풍습을 그대로 지키며 살았다. 힘들고 쓰라린 첫 이민의 경험이지만 이들로 인해 우리 민족의 해외 이주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특히 해외 민족 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독립운동의 지원본부가 되어주었던 곳. 그래서 115년이 흐른 지금 그 역사가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