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으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 조지 카버

땅콩으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 조지 카버
(상상북스발행, 샘 웰만 지음, 손덕호 옮김)

꿈과 열정이 있으면 최고가 될 수 있다.
내가 못하는 열 가지를 보지 말고
내가 잘할 수 있는 한 가지에 집중하면
내가 될 수 있는 최고가 될 수 있다.
- 책 본문 중에서 -
땅콩 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
(George Washington Carver, 1864.1943)

'전 미국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미국 최초의 위대한 흑인' 이었던 그를 1941년 타임지는 '검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표현하였다. 에브라함 링컨은 노예들을 해방시켰지만 조지 워싱턴 카버는 남부지역을 해방시켰다. 조지 워싱톤 카버 박사는 1860년 경, 미천한 흑인 노예로 태어났지만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흑인과 백인을 총망라하여 전 미국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미국 최초의 위대한 흑인으로 미국 제1의 농학자이자 과학자요, 계몽가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싫어하는 백인들은 있지만 워싱턴 카버를 싫어하는 백인들은 없다고 한다. "카버는 평생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한 겸손한 과학자입니다. 그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1939년 미국의 제 26대 대통령 루스벨트가 조지 워싱턴 카버에게 루스벨트 메달을 수여하면서 한 유명한 말이다.

위대한 흑인 노예의 탄생

오늘날 농산물 응용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 카버(1864-1943)는 미국의 남북 전쟁(1861-1865)이 발발하던 무렵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북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노예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흑인들의 삶이 금방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고 흑인들에게는 아직 아무런 생활의 기반이 없었다. 전보다도 더욱 어려운 환경아래서 백인들과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해야 하는 카버의 생애는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시작됐다.

카버의 어머니 메리는 사고로 일찍 남편을 잃은 미망인으로 미조리주 개척지대에서 카버라고 하는 온화한 성품의 백인 부부 밑에서 잡일군으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당시 전쟁의 후유증은 쉽게 아물지를 않아 민심은 여전히 갈라져 있었고 '흑인들이 자유롭게 사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일부 백인들은 흑인들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무장 폭도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흑인과 그들의 소유를 약탈하여 노예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던 남부에 가서 팔아 치웠다.
성탄절을 앞둔 어느날 밤, 메리와 조지도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흑인 모자를 애타게 찾을 사람은 없었지만 이들과 살던 백인부부는 훌륭한 사람들이어서 이들은 끈질기게 수소문한 결과 흑인모자를 빼앗아간 폭도들을 찾아냈지만 이미 조지의 어머니는 어디론가 팔려가 버린 뒤였다. 때가 찌들은 보자기에 쌓인 어린 조지만 겨우 찾을 수 있었는데 납치범들이 버리고 간 이 어린 아기의 몸값은 말한 필이었다. 이 아이가 훗날 남부를 구원한 위대한 과학자가 될 것이 라는 것을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어린시절 카버 내외와 함께 생활 하게 된 조지는 카버 부인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자라게 되는데 실을 뽑고, 비누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 들판에서 약뿌리를 캐고, 음식 만드는 일도 배웠다. 전쟁 직후 모든 것을 자급해야 되는 당시는 참으로 만능의 재주가 필요하였다. 타고 난 성실성과 눈썰미를 지닌 조지는 그 모든 일들을 잘 해냈다. 조지는 특별히 창의성이 뛰어난 아이로 하루 일과 자체가 자신을 개발하는 도구였다. 자연을 보는 그의 눈은 남달라 "조지는 화초에도 전문가구나." 사람들은 이렇게 칭찬했다. 주위에는 그보다 화초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신기하게도 시들어 가던 화초들도 생생하게 원기를 회복했다.

당시 미조리주 주법은 흑인을 위한 교육을 허락지 않았다. "장미꽃에도 붉은 장미와 노란 장미가 있지요. 사람에게도 단지 다른 인종이 있을 뿐입니다. 백인이 흑인보다 낫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당시 카버의 심경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다가왔다. 한 때 미조리 주의 수도였던 네오쇼에 가면 흑인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흑인들을 가르치던 링컨 학교였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세탁업과 산파 노릇을 하던 마리아 왓킨스라는 흑인 여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집에서 허드렛 일을 도와주면서 그녀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언젠가 미국의 한 유명한 상원의원이 카버 박사에게 "당신은 도대체 그 모든 것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책이었지요" 라고 카버가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책입니까" 그 상원 의원이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나님의 말씀! 바로 성경입니다" 누구하나 의지할 자 없던 카버의 생애를 지탱해 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상식으로 보면 그는 외로운 삶을 살아갔어야 했지만 그는 결코 조금도 외롭지 않았고, 고독과 우울한 그런 삶도 살지 않았으며 어려움 가운데 서도 그는 늘 유머 감각이 넘쳤다.

온갖 잡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며 공부하던 카버는 1880년 20세가 되면서 미네아폴리스에서 세탁업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등학교 과정을 시작했다. 이 때 동료 학생 중에 조지 카버와 동명이인이 있어 그에게 워싱턴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졸업을 앞두고 하일랜드 주의 장로교 계통의 대학에 지원한 그는 또한번 큰 상처를 받게 되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 허가서를 받고 찾아간 학교에서 그의 입학을 거부한 것이다. 그것도 그를 본 학장이 완강히 그의 입학을 막았는데 이유는 단 하나 흑인은 그때까지 한사람도 이 학교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상심해 있던 카버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890년 9월, 침례교회에서 만난 존 밀홀랜드라는 의사 부부가 그에게 인디아놀라의 심슨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교 설립자인 감리교 감독 매튜 심슨은 하나님 안에서 만인의 평등권을 주장한 사람이다. 이곳에서 그는 미술을 가르치는 버드라는 선생을 만난다. 카버가 미술에 아주 뛰어난 학생이면서도 식물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자질이 더욱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그녀가 한가지 제안을 했다.

"조지는 식물에 관심이 많은 것같아. 하나님의 뜻이 그곳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미술은 다른 사람이라도 할 수 있지만 가난한 동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은 다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가로서의 인생을 접고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곧 아이오와 농과 대학의 원예학 교수로 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카버를 소개해 주었다. 오늘날도 미국의 유명한 농과대학인 이 아이오와 주립 농과대학은 당시 최신농법을 연구하기 시작하던 학교였다.

세상을 바꾼 노예, 사랑의 과학자

1894년 이 학교를 수석 졸업한 카버는 당시 가장 저명한 식물학자였던 루이스 파멜 교수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뛰어난 원예작물의 접목법을 개발하여 세균에 대한 과일나무와 식물의 저항력을 크게 높였다. 세균학을 공부하여 2만 가지가 넘는 표본을 수집하기도 했다. 농업 응용화학 분야에서 카버는 명성을 높여가며 권위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고민이 그의 머리를 늘 떠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불쌍한 흑인 동족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 이었다. 마침 카버는 부커 워싱턴으로부터 한통의 감동적인 편지를 받게 되는데 부커 워싱턴은 당시 흑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1896년 흑인을 위한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이나 지위나 명예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얻으려면 지금의 당신 지위로도 가능하겠지요.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은 바로 그 세 가지를 단념해 달라는 것으로 내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곧 타락하고 가난하며 버려질 운명에 있는 우리 동족 흑인들을 구출하여 떳떳한 인간으로 만드는 일을 부탁하려는 것입니다".

부커도 물론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던 사람으로 그는 무지한 흑인들에게 자유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심어주는 길은 교육뿐임을 느끼고 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알라바마의 터스키지학원에 농학부를 설치하면서 부커는 카버에게 자신과 함께 동역하기를 간절히 부탁했고, 1896년 10월 이 일은 카버에게 맡겨졌다.

당시 남부의 흑인 농민들은 주로 면화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 장소에 한가지 농사만을 계속해서 짓다보니 토지는 계속 척박해져 갔다. 그는 이렇게 황폐해져 가는 토질을 개량해 가면서 새로운 농법을 가르쳤고 면화뿐 아니라 새로운 작물도 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소유의 농장은 놀라울 정도로 비옥한 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면화뿐 아니라 땅콩, 고구마들도 수확되었다. 처음에 카버 박사를 의심하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카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농민학원을 열어 사람들을 계도하기 시작하여 농법을 가르쳐 주고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서 이동학교를 열기도 하였다. 이 이동학교는 남부의 곳곳을 다니며 미국의 가난한 흑인 농촌 지역들을 변화시켰다.

카버가 57세 되던 해 발명왕 에디슨의 이름을 딴 토머스 에디슨 연구소가 그에게 지금 연봉보다 1천배 더 많은 연봉 10만 달러를 제의하면서 자신들과 함께 일하자고 간청했지만 그는 조용히 거절했다. 그는 22년 동안 봉사하던 터스키지에 남기를 원했고 이후에도 계속 터스키지에 남았다. 10만달러는 지금도 큰 돈이지만 당시는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 그가 좀더 훌륭한 연구 시설을 갖춘 곳에서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마음껏 연구 생활을 펼쳤다면 인류 역사에 더욱 커다란 금자탑을 세운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의 정식 수입이란 말년까지 1896년 부커 교장이 정했던 월 125달러가 전부였다. 한 때 미국의 남부지방은 면화재배로 유명했지만 면화는 땅의 질소를 빼앗아 면화재배가 성하는 만큼 비옥했던 땅은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남부의 사람들은 면화재배를 계속하기 위해 계속 새로운 땅을 일궈야 했고, 질소를 잃은 미국 남부의 거의 모든 땅이 못쓰게 되고 말았다. 미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남부의 경제가 위기에 봉착했고 그것은 곧 미국 경제의 위기였다.그때 죠지 워싱톤 카버 박사는 질소를 잃은 황폐한 땅에 땅콩을 심으면 땅콩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땅콩이 땅에 질소를 공급해주어 황폐한 땅이 도리어 비옥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제안에 따라 미국 남부는 거대한 땅콩 농장이 되었고 정말로 땅콩 수확도 풍년이었고 땅도 되살아났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생겼났다. 미국 남부의 농장마다 거둬 들인 거대한 양의 땅콩을 소화할 방법이 없어 농장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땅콩으로 인해 농부들은 오히려 살길이 막연해지고 말았다. 땅콩 심기를 권유했던 카버 박사로서는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카버 박사의 전기에는 그 때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마음이 괴로워서 10월 어느 날 새벽, 해 뜨기 전에 산속으로 들어가서 거닐다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창조주시여! 당신은 무엇을 하시려고 이 우주를 창조하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는 너의 작은 소견으로 너무 큰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네게 알맞는 것을 물어 보아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시려는지 말씀해 달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아직도 네가 감당치 못할 큰 것을 묻고 있구나. 그런 쓸데없는 것은 묻지 말고 네가 마음속으로 진정 원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말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나도 엄숙해졌다. 한참만에 나는 마지막으로 말씀 드렸다. 하나님! 당신은 무엇을 하시려고 땅콩을 심게 하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옳지 이제 됐다. 너는 땅콩을 한 줌 들고 실험실로 들어가서 연구를 계속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길로 땅콩을 들고 연구실에 들어간 카버 박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한 결과, 땅콩을 이용하여 마가린, 비누, 요리용 기름, 화장품용 기름, 인조사탕, 인조 밀가루, 땅콩 버터, 잉크, 물감, 구두약, 연고, 크림 등 무려 105가지의 음식과 200여 가지의 실용품을 발명해 내었고 그의 덕분에 미국 남부 주민들은 땅콩 재배로 해마다 돈을 벌었고 미국의 경제가 견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푼의 로얄티도 받지 않았다. 그 모든 지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부의 농부를 구하기 위해 자기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