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연의 그림과 함께하는 수필 - 마음속에 있는 지도 한장

언제부터인지 가끔 어떤 사람을 만나면, 문득 예전 어느 기억 속에서의 아늑하고 향긋한 냄새를 떠오르게 하는 순간이 있다. “아~ 그게 무엇이었지?” 하면서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그냥 흘러가는 따뜻한 기억 속의 냄새이다. 그렇지, 사람에게는 저마다 인생의 스쳐 가는 골목길 풍경이 다르듯, 서로 다름의 향으로 풍겨 나오는 것이다. 정말 환한 햇살만 넘칠 것 같았던 눈부신 젊음이었을 때는 사는 냄새를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었는데, 어느 날부터 돋보기안경을 써야만 편하게 책과 신문을 읽을 수 있고, 해가 짧은 겨울밤에 하는 운전이 왠지 망설여지고, 소소한 작은 일들을 잘 잊어버려 부엌에 걸어놓은 기다란 달력에다 큼지막하게 써놓게 되면서부터 예민해진 거 같다. 살다보면 좋지않은 것도 오지만 좋은 일도 덤으로 함께 오는 것이라 믿으며 산다. 그렇게 세월 따라 오래 사용한 것에 대한 고장으로 오는 거라면, 순순히 저항하지 않고 백기 들어 항복하고서 받아들인다.

한때 영롱한 청춘으로 열렬히 연애하느라 학교 수업도 간간이 빼먹으면서, 결혼 전 남편이랑 명동 어느 구석진 술집에서 매운 안주 맛을 배우던 시절이 있었다. 미국행을 결심한 남편은 모든 청춘이 그러하듯 가난했었고 새로운 삶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투명한 초록색 병의 소주를 마시곤 했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든 때라 마냥 곁에서 고민하는 모습조차도 좋아 어디든 따라다녔지만, 남편은 미국으로 떠났고 오롯이 혼자 남겨진 것이 싫어 늘 늦은 시간까지 친구네 화실에서 지내다 텅 빈 버스를 타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비가 오는 날, 갑자기 버스 안에서 낯익은 냄새가 느껴져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뒤돌아보니 어떤 술 취한 아저씨의 냄새였던 것이다. 어쩌다 가끔 떠올려보면 방황하는 젊음의 시간 냄새가 겨우 술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우습지만, 그래도 그때의 유치함과 진지함이 또 다른 상처의 냄새였다고 변명하며, 내게 왔든 그날들 모두가 아름다운 삶의 조각들이며 소중하다.

여전히 정작 스스로의 냄새는 맡지 못하지만 - 오랜 시간 속에서 배운 본능적인 감각과 느긋함으로 - 속도 조절 없이 오는 세월의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욕심도 이제는 소용없고 의미도 없다. 다만 멀리서 눈빛으로 마주쳐도 닮고 싶고, 길게 말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존경의 머리가 숙어지며, 지니고 있는 손때 묻은 작은 손수건 한 장이라도 갖고 싶어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사는 냄새의 제대로 된 진한 흉내라도 내보련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