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역사

1834년 8월1일 영국 노예해방 선언

1834년 8월1일 영국의 약 800,000명의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얻었다. 영국 수상 찰스 그레이가 모든 영국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총 20만에 달하는 노예를 해방한다고 공식 발표 했다. 또 영국정부는 노예제 폐지와 함께 노예 소유주들에게 총 2천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 선언은 영국을 넘어 아프리카와 전 세계에 큰 영향을 준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15세기 노예제도가 시작된 후 1660년부터 1807년까지 약 160년간 노예 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이 기간 동안 약 12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이때 최대 노예 무역 국가는 영국이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최초로 노예무역과 노예제도가 폐지되게 된 것이다. 노예제 폐지를 위해 가장 노력한 사람은 윌리엄 월버포스(William Wilberfoce) 로 21세에 하원 의원이 되어 45년간 노예제 폐지를 목표로 일생을 바쳤다. 윌버포스는 숱한 위협과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시와 노래, 사진 판매, 노예제도를 통해 생산된 설탕 불매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 운동 등 다양한 방식을 총동원하며 노예제도 폐지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마침내 1807년 1월 2일 법안 통과를 이끌어 내며 전 세계 인권 문제에 큰 획을 긋게 되었다. 영국 노예제도 폐지는 미국의 노예제도에도 영향을 미쳤고 1863년 미국에서도 노예 해방을 선언하게 하는 그 시발점이 되었다.

1925년 8월 8일 KKK단 제1회 전국대회

KKK단은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의 극우비밀결사단을 말한다. 남북전쟁 이후 남부 백인들은 급진적인 지하 저항세력의 중추 조직인 KKK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뾰족한 고깔 모자를 쓰고 흰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며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반로마가톨릭교회, 기독교 근본주의 등의 표방했다. 처음에는 위협과 협박으로 백인의 지배권을 주장했으며 점점 세력이 확장되면서부터 이들은 흑인 해방에 동조하는 백인들을 구타하거나 그들의 집을 불태우는 등 끔찍한 테러를 저지르며 백인 지배를 부활시키고자 했다. 1960년대 후반 조직이 와해 되었지만 1915년 군인 출신의 윌리엄 시몬스(William Joseph Simmons) 목사에 의해 다시 부활되었다. 이들은 흑인 뿐 아니라 유대인, 가톨릭, 이민자 등에게도 폭력을 행사했고 급속하게 확대되어 1924년에는 오레곤, 오클라호마 등 7개주에 걸쳐 회원이 450만명에 이를 정도로 세력이 급성장 했다. 그리고 KKK단의 규모는 1925년 8월8일 워싱턴에서 전국 대회가 열리며 모습이 드러났다. 이날 모인 참가자만 20만명, 이들의 거리 행진에 전 세계가 들썩였다. 하지만 전국대회 이후 KKK단의 무자비한 공격과 살인 사건 등으로 이들의 지지층이 등을 돌리게 되고 전국 조직이 붕괴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5일 북한 민항기 50년만에 한국에 첫 취항

북측 이산가족 상봉자 100명, 수행원 30명 등 모두 151명을 태운 북한 고려항공 소속 특별기가 2000년 8월15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남북 분단 이후 50년만의 일이었다. 특별기는 남측에서 열리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오전 10시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 서해안으로 빠져 나가 우리 영공에서 인천 방향으로 돌리는 코스를 택하여 운항했다. 이 코스는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때 처음 이용 되었던 코스다. 북한 고려항공 김태진 조종사는 "북한 동포의 만남을 직접 주선하게 된 것에 대해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고 소감을 밝혔다. 북한 이산가족 상봉자들은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을 숙소로 했으며 서울 종합전시장(COEX) 3층 컨벤션 홀에서 50년만에 그리던 혈육을 만나 3박4일간 뜨거운 상봉의 시간을 갖었고, 컨벤션홀은 분단의 슬픔으로 가득 채워져 통곡의 장으로 변했다. 북측 상봉단은 3박4일의 일정이 끝난 후 8월 18일 대한 항공편으로 귀환했다.

2005년 8월14일 8.15 민족대축전

2005년 8월14일부터 17일까지 서울에서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축전' 이 개최되었다.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북측에서는 180여명, 해외에서 250여명, 남측에서는 400여명이 참가했다. 북측 대표단은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 국장을 단장으로 100여명의 민간 대표단과 김기남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필두로 82명의 남녀 축구선수단이 참여했다. 남, 북 대표단은 개막식 행사가 열리는 상암경기장에서 함께 손을 잡고 민족 대행진을 펼쳤다. 단합된 남,북 대표단의 모습에 경기장을 찾은 6만명의 시민들은 뜨거운 환호를 보내며 일제히 단일기를 흔들었다. 이어 남과 북 그리고 해외 대표 3인은 백두산과 한라산에서 채화한 성화를 성화대에 점화하였고 7천만 겨레의 염원을 담은 통일기가 상암 경기장에 게양되었다. 개막식이 끝나고 열린 남,북 축구대회에서는 3:0 으로 남측이 이겼으며 관중석에서는 양팀 모두를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8.15 민족대축전이 열리는 동안 대표단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참관, 대일 규탄 성명 등의 다양한 행사에 참여했으며 여성, 청년학생, 정치, 종교, 통일 연대 등 10여개 부문의 관계자들의 상봉 모임도 있었다. 폐막하는 순간까지 통일의 염원을 담은 대표단들의 뜨거운 마음은 완벽한 행사를 만들어내며 민족 통일을 위해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열리길 기원했다.

2003년 8월29일 주5일 근무제 개정안 국회 통과

2003년 8월29일 '주5일 근무제' 실시를 골자로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찬성 141표, 반대 57표, 기권 32표로 국회를 통과했다. 2000년 5월 법정 근로 시간을 44시간에서 40 시간으로 단축하도록 근로 기준법을 개정하겠다는 최선정 노동부 장관의 발표 후 대한민국의 노사는 3년간 홍역을 앓으며 뜨거운 찬반 공방을 벌였다. '주5일 근무제 개정안' 은 일주일에 40시간 이상 근무를 하지 못하도록 법적 제제를 하고 불가피한 사유로 일주일에 40시간을 초과하여 근무할 경우 초과근무시간에 따른 대체 휴일을 지급해주거나 초과 수당을 지급해준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개정안의 국회 통과 이후 1000명 이상의 사업장은 2004년 7월1일, 300인 이상의 사업장은 2005년 7월 1일, 5명 이상의 사업장은 2011년 7월1일 등 단계적으로 확대되어 시행되었다. 정부는 '주5일 근무제 개정안' 을 통해 근로자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문화, 관광 등의 레저 산업의 발전을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