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역사

1965년 8월 11일 미국 와츠 흑인폭동

1965년 8월11일 미국 LA 흑인 거주지 와츠(Watts) 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는 오랫동안 쌓여온 흑백간의 갈등과 대립이었다. 폭동의 시발점은 21살의 흑인 청년의 음주운전 이었다. 청년은 음주운전을 하다가 경찰의 정당한 단속에 적발되었다. 경찰들이 연행 절차를 진행하던 중 소식을 들은 흑인 청년의 엄마가 도착했고 그녀는 아들이 자신의 차를 몰래 몰고 나가 음주 운전까지 한 것에 흥분하여 아들의 멱살을 쥐고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한동안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던 경찰이 엄마와 아들을 떼어놓고 아들을 경찰차에 태우려는 실갱이 도중 엄마를 밀쳤고 흥분한 엄마는 경찰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주변의 흑인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자 경찰관이 권총을 뽑았고 주변 사람들은 경찰들을 향해 돌과 병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성난 군중은 폭동으로 변해갔고 겉잡을 수 없는 잘못된 소문들로 인해 결국 6일간 폭동이 이어져 34명이 숨졌고 1,032명이 다쳤으며 3,438명의 흑인이 체포되었다. 와츠는 주민 98% 가 흑인으로 빈곤과 높은 실업률, 범죄가 만연한 곳이다. 마약 중독률도 높으며 소외된 흑인들이 모여 살며 백인에 대한 잠재된 불만이 가득했던 곳이었다. 3천여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진압에 나섰지만 거리는 약탈, 방화등으로 무법천지였고 결국 '폭동사태선언' 이 발표되고 1만 4천여명의 주 방위군이 동원되고서야 겨우 진압되었다.

2003년 8월 4일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투신자살

현대 그룹을 일궜던 정주영 명예회장의 5남인 정몽헌 현대 아산 이사회 회장이 투신 자살했다. 2003년 8월 4일 오전 5시 50분쯤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본사 사옥 뒤편 주차장 앞 화단에서 정회장이 쓰러져 숨져있는 것을 사옥 청소원 윤모씨가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으며 국내외 언론은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당시 정회장은 경영난과 대북송금 및 현대비자금 조성 수사에 대한 심리적 압박이 매우 컸던 것으로 전해졌으며 자살하기 하루 전인 8월2일에도 12시간이나 검찰의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몽헌 회장은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과 부인, 자녀 앞으로 4장의 유서를 통해 '대북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길 바란다'는 내용과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정몽헌 회장은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1975년 현대중공업 차장으로 현대 그룹에 입사했다. 이후 부인과 미국 유학길에 올라 뉴저지 페얼리디킨슨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이후 1981년 현대상선 사장을 시작으로 최고 경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신임을 바탕으로 1998년 형인 정몽구 회장과 함께 현대그룹 공동회장이 됐다. 이후 2000년 6월 현대 아산 회장에 취임하면서 대북사업에만 전념했었다. 정몽헌 회장의 장례식은2003년 8월 8일 오전 서울 아산병원에서 치러졌다.

1974년 8월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식을 갖고 첫 운행을 시작했다. 첫 열차는 108호로 청량리에서 서울역까지 운행했으며 '종로선' 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정차역 수는 서울역, 시청, 종각, 종로3가, 종로5가, 동대문, 동묘앞, 신설동, 제기동, 청량리 이렇게 10곳이며 당시 기본 구간 요금은 30원이었다. 1968년 도로교통 체증이 심각해지면서 서울시는 전차를 없앴다. 때문에 많은 도시 노동자들을 위한 대중 교통이 시급해졌고 정부는 지하철 공사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후 1971년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었고 총 3백30억원을 들여 착공 3년 4개월만에 완공되었다. 첫 개통을 시작한 이후 지하철은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교통수단이 되었고 일본과 중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3번째로 지하철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2010년 8월5일 칠레 광산 붕괴사고

칠레의 코피아포 인근에 있는 산호세 광산에서 구리를 채굴하던 중 33명의 광부가 지하에 매몰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33명의 광부들은 모두 땅속에서 69~70일간 생존해 있다가 2010년 10월 13일 바깥으로 모두 구출되었다. 광부들은 구부러진 수직 갱도 입구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지하 약 622미터 지점에 매몰되었다. 이 광산은 불안정하여 예전에도 한 명이 사망한 사고가 있던 곳이었다. 그들은 매몰상황에서도 서로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도왔고 구조되는 순간까지 침착하고 질서 있게 행동한 덕분에 모두가 안전하게 구조되었으며 건강 상태도 양호했다. 1명을 구조하는데 30분에서 1시간이 걸려 33명 모두를 구출하는데 하루 이상이 걸렸다. 구출 과정은 TV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오직 희망만을 품은 채 어둠 속에서 끈끈한 동료애로 버텨온 그들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큰 감동을 전해주었다.

2005년 8월25일 허리케인 카트리나 플로리다 반도 상륙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200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 동쪽 약 280km 에서 열대성 저기압으로 발생하여 8월30일 소멸하기까지 미국 남동부를 강타하였다. 80% 이상이 해수면보다 지대가 낮은 뉴올리언스에서 피해가 가장 컸다. 카트리나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폭풍으로 기록되었는데 최대 풍속은 75m/s, 직경은 700km였다. 당시 뉴올리언스 시민 수십만 명이 피신하였지만 빈민층과 노인들은 그대로 시내에 남아 슈퍼볼 경기장에서 대피하였다. 태풍의 눈은 도시 동쪽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홍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제방 시스템을 완전히 무너뜨리면서 물이 시가지로 밀려들어와 시내가 초토화 되었고 뉴올리언스 시의 80%가 침수되었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에는 무장한 개인과 집단의 약탈과 폭동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고, 연방정부가 뒤늦게 사태수습에 나섰지만 재앙에 늦게 대응한 정부는 강력한 비판을 피해갈 순 없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주민 중 2만명 이상 실종되었고 슈퍼돔과 뉴올리언즈컨벤션 센터에 약 8만여명이 구조되어 수용되었으며 인명 피해만도 약 2,541명으로 집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