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역사

1863년 1월1일 링컨, 노예해방 선언

링컨 미국 대통령이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그 이튿날 1862년 9월22일 ‘노예해방 예비선언’ 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1863년 1월1일 이후 부터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반란 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면 해방한다는 내용으로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여러 주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다. 반란 상태에 있는 주에서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도 있었으며 흑인들의 연방 군대 입대를 허용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결국 흑인이 북군 병력에 흡수하게 됨으로 북군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도 됐다. 예비선언 발표 후 자치주가 이에 응하지 않자, 링컨은 1863년 1월1일 흑인 노예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선언은 북부인들에게는 명분없는 전쟁이었던 남북전쟁에 도덕적 명분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고 자유와 인권을 지키고자 했던 미국 독립전쟁때 처럼 같은 전쟁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은 미연방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한 전쟁의 부수적인 산물이었고 인도적인 명분에서 출발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북부의 산업 자본가와 남부의 대지주 사이의 경제적 이해 대립이 전쟁으로 폭발한 뒤에 그 의미를 찾아가게 되었다.

1994년 1월10일 한국탐험대 걸어서 남극점 정복에 성공

한국 남극점탐험대가 1,400여km 를 걸어서 44일만에 남극점 정복에 성공했다. 허영호 대장과 김승환, 유재춘, 홍성택 탐험대원들은 짙은 구름과 안개로 화이트아웃 현상까지 겹치면서 발을 내딛는 곳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도 모를 악조건에서 걸었다. 기온은 영하 30도를 오르내렸고 초속 2-30m 의 살을 에는 바람과도 싸워야 했다. 그리고 44일만에 1994년 1월10일 오후 6시30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남위 90도 남극점에 태극기를 꽂았다. 허영호 대장이 이끈 한국탐험대는 1993년 11월20일이 서울을 출발 남극대륙 서북쪽 해안 패트리엇 힐에 도착했다. 이들은 1인당 120kg의 장비와 식량을 썰매에 싣고 남극점을 향해 도보로 걸었다. 남극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북극과 함께 지구 3극점으로 불린다. 남극점은 1911년 12월 노르웨이의 아문센에 의해 최초로 정복되었고 도보로 남극점 정복에 성공한 나라는 영국, 이탈리아, 일본에 이어 한국이 4번째 국가가 되었다. 한국 탐험대는 개썰매나 스노모빌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도보로 갔으며 단 한번의 중간 보급도 받지 않은 무보급, 무휴식이라는 신기록까지 이뤘다. 한국은 1977년 에베레스트 정복, 1991년 북극점 정복에 이어 남극점 정복으로 3극점에 모두 태극기를 꽂았으며 허영호 대장은 3대 극정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밟은 세계 최초의 산악인이 되었다.

19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 발족

북미 자유무역협정은 북미의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이 관세와 무역 장벽을 없애고 자유 무역권을 형성한 것을 말한다. 1989년 미국과 캐나다 간에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1992년 멕시코가 동참하면서 북미자유무역협정이 완성되었다. 이후 1994년 NAFTA 가 정식 발효되었다. NAFTA에 대한 협상은 1991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협정 체결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고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1992년 미국과 캐나다 안에서는 자국내 제조업이 큰 타격을 입고 실업률이 증가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멕시코 역시 1차 산업이 붕괴되고 자국 경제가 미국에 종속될 거라는 우려가 대두됐다. NAFTA가 체결된 1994년에는 멕시코 원주민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무장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이들 나라의 인구와 국내총 생산 규모는 각각 3억6천만명과 6조달러로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블록 이었고, 지금도 세계 주요 경제 블록 중 하나다. NAFTA 는 무역 장벽 해소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 고용창출, 민주주의 강화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 1993년 1월~10월 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3개국 간 무역량은 3026억 달러였지만 2013년 같은 기간에는 9509억 달러로 3배 가량 증가했다. NAFTA 체결 이후에는 비약적으로 수출이 증가했다.
특히 멕시코의 경우 1993년 519억 달러에서 2013년 3709억 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블록화가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무역 적자가 1,810억 달러로 증가했고 1백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으며 멕시코로부터의 이민도 2배 증가했다.

1903년 1월13일 한인 미주 이민의 시작

최초의 한인 이민선 ‘갤릭(Gaelic)호’ 가 101명의 한인 이민자들과 통역인을 태우고 1903년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 미주 한인 이민의 그 시작을 알렸다.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최초로 호놀룰루에 간 한국인은 1899년 신의주 출신의 인삼 상인들인 최동순, 장승봉, 강군철, 이재실, 박성근 등이었는데 이들은 당시 중국인으로 분류가 되었고 한국 민간인으로 하와이 이민국에 기록된 첫번째 입국자는 1900년 1월 15일에 상륙한 양백인, 김일수 두 사람이었다. 1905년까지 한인 이민자는 총 7,226명으로 이들은 대부분 노동력이 부족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으며 자녀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또 조선사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던 개국진취운동의 영향이 이민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하와이 이민은 수민원에서 발행한 여권인 집조를 가지고 노동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진 첫 해외 이민이었다.
1902년 12월22일 제물포에서 121명의 이민자를 태운 한국 역사상 첫 공식 이민선은 눈물속에 미지의 땅 하와이를 향해 출발했으며 일본 고베에 도착하여 신체 검사를 통해 최종 101명이 통역원과 함께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20일의 행해 끝에 호놀룰루에 도착하게 되었다. 당시 이민자들은 3년간 일하는 조건으로 하루 품삯은 50-80센트 (쌀 10kg이 1달러) 였으며 고된 노동과 정신적 고통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인 미주 이민의 첫 역사가 된 이들의 개척은 미주 한인 사회 건설과 조국 광복 운동의 주춧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