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역사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다.

1995년 4월 삼풍백화점의 건물 5층 남쪽 천장에 균열이 발견되기 시작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5월에 들어서자 균열은 더욱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5층은 폐쇄되었고 토목공학자들을 불러 검사를 한 결과 건물붕괴의 위험이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역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6월 29일은 목요일이었다. 5층에서 큰 소리가 몇 번 들려왔다. 균열은 더욱 심각해졌다. 오후 5시경 4층의 천장이 가라 앉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고객들이 4층으로 가는 것을 막았을 뿐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수 많은 고객들이 여전히 쇼핑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고발생 약 7분전 건물이 붕괴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고객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건물은 무너지기 시작한지 20초 만에 지하 4층까지 붕괴되었다. 고객과 종업원 1500명은 그대로 매몰되어서 사망하거나 다쳤다. 삼풍백화점 사고의 원인은 다양하다. 하지만 무리한 설계의 변경이 사고의 주된 원인으로 보여지고 있다. 무사안일주의와 안전불감증이란 말이 삼풍백화점 사고의 모든 것을 대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풍백화점의 과정을 살펴보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고 조금만 더 대처를 잘했더라도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89년6월21일 유네스코 문맹퇴치 공로상 세종대왕상 창설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교육 과학 문화 등의 지적 활동 분야에서 국제 이해와 협력을 촉진함으로써 세계 평화와 인류 발전을 증진 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유엔전문기구이다.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있고 전 세계에 걸쳐 53개의 지역 사무소와 11개의 산하 기구를 두고 있다. 이곳에 1989년 6월 21일 한국어 이름의 상이 제정되었다. 1989년 6월 21일 유네스코 집행위원회는 세계적으로 문맹 퇴치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문맹 퇴치 공로상의 이름을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 로 결정했다. 이는 우리 정부의 제안으로 이뤄졌으며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세종대왕상의 수상 대상은 문맹퇴치에 직접 종사한 경우, 국가 또는 지역단위의 문맹퇴치 사업에 종사한 경우, 문맹 퇴치를 위한 언론 캠페인에 종사한 경우,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 자재 개발 및 생산 등 문맹 퇴치의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 매년 9월 8일 ‘국제 문해의 날’ 공식 행사에서 시상된다. 수상자는 심사위원단의 평가 등을 바탕으로 유네스코 사무총장에 의해 선정되며 미화 2만 달러와 은으로 제작된 메달, 상장을 부상으로 받게 된다.

1999년 제1차 ‘연평해전’ 이 일어나다.

서해 연평도 부근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과 조선 인민군 해군의 교전이 일어났다. 교전은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이 연평도 서쪽 NLL을 침범하면서 일어났다. 대한민국 해군은 참수리급 고속정과 초계함 10여척을 동원하여 해군 교전 수칙에 따라 경고방송을 했지만 북한국 경비정은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접근하여 충돌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국 경비정은 기관포로 공격을 가해왔으며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급 고속정과 포항급 초계함의 반격으로 반파되어 퇴각했다. 14분간 진행된 교전에서 참수리급 고속정 안지영 대위를 비롯한 장병 7명이 부상당해 긴급 후송되었고, 북한군은 어뢰정 1척 침몰, 경비정 1척 반파, 3척이 파손되고 1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후 2002년 6월29일 제2연평해전이 일어났고, 대한민국은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북한군 13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1949년 김구 전 임시정부 주석이 암살되다.

김구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종교인, 교육자, 정치인이기도 하다.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했다. 젊어서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해 독립운동가들과 중국 관내 여러지역으로 임시정부를 옮겨다니기도 했다.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동경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등을 지휘하며 수많은 독립운동의 수장으로, 또 통일운동의 거목으로 활동했다. 김구는 1949년 6월26일 낮 포병소위 안두희로 인해 경교장에서 살해당했다. 김구 살해사건이 오랫동안 한국인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모은 것은 누가 최고 배후냐는 문제때문이었다. 수많은 정치적 의혹만 남기고 김구의 죽음은 국민들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 한국 역사상 최대인파가 장례식에 다녀갔으며,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서민적 지도자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애국자로 남았다.

2009년 6월25일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사망

'마이클 잭슨' 은 2009년 6월 25일 낮 12시쯤 미국 LA 자택에서 심장마비 증세를 보여 911에 긴급 구조를 요청했고 도착한 의료진은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고 UCLA 메디컬 센터로 옮겨졌지만 사망했다. 미 소방당국은 6월25일 오후 2시26분 '마이클 잭슨' 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인은 '마이클 잭슨' 의 불면증 치료를 담당하고 있던 개인 의사 콘래드 머레이가 마취제인 프로포폴을 과다 투여한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강력한 마취제인 프로포폴50mg을 정맥에 주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마이클 잭슨' 은 오랜 공백을 깨고 영국 런던에서 컴백 라이브 콘서트를 준비 중이었으며 장기 시즌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의 사망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기록적인 애도 물결이 일어났다. 이후 수많은 스타들이 한 자리에서 그를 추모하는 공식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팝의 황제라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았던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은 해외 유명 스타의 사망 소식 중 가장 큰 충격적인 일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