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최의 행복한 쉼터 - 임의 침묵

시계를본다. 한시간 10분 남았다. 은근슬쩍 퇴근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종종 변수가 생기는 날이 많아 마음이 초조해진다. 어느덧 분침은 20분을 남겨두고 있다. 이 상태로라면 오늘은 칼퇴근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드디어 오버타임에 걸리지 않고 회사의 정문을 빠져 나오는데 성공한다. 나는 야호 쾌재를 부른다.

주차장까지 한 걸음에 도착하는 동안에도 백도를 웃도는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온 몸을 휘감는다. 덩달아 내 심장의 온도도 상승함을 감지한다. 후끈 달아 오른 몸과 마음을 재빨리 자동차의 에어컨디션으로 식혀 보려하지만 그 뜨거움은 꺼질줄을 모른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기다리고 있을 사랑하는 그에게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픈 열정일게다.

처음 만났을 당시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지적인 짙은 눈썹과 총명하고 선한 눈빛 , 반듯한 이마와 높은 콧날, 그리고 왼쪽 입가의 까만 점과 부드러운 까만 머리결은 여심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게다가 우람하고 단단한 체격과 중저음인 목소리는 세상의 어떤 시름도 다 잊게 만드는 매력 투성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잘 생겼다는 얘긴데 그러나 웬지 나는 그런 그에게 냉냉하리만큼 덤덤했다.

이후 우리의 동거는 강산이 두번이나 바뀔 만큼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의 비단결 같은 머릿결은 고슴도치처럼 뻣뻣하게 변했고 건강하고 매끄럽던 몸 곳곳엔 피부병이 퍼져있다. 귀도 안들리고 눈도 멀었으며 한 걸음도 못 걸어 2년 여가까이 기저귀를 착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통가운데 있는 그가 그나마 유일하게 즐거워하는 것은 베드에 누워서라도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최대한 코를 벌름거려서라도 나의 내음을 저장하려는 듯 애를 쓰기도 한다.

나는 이런 그와 늦깍이 사랑에 빠져버렸다. 볏집처럼 허물어지고 구겨져 버린 그의 처참한 모양새는 그 어떤 모습보다 더 아름답고 귀하기만 하다. 하루에도 수차례 목욕을 시켜보지만 가시지 않는 꼴꼴한 냄새조차 지극히 자연스럽다. 나의 연인 '버리'는 이제 서서히 침묵속으로 빠져든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내게 꼬리를 흔든다.
"엄마 사랑해요. 행복했어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굿바이.."

담당 수의사는 말한다.
"이 땅에서 24년 6개월을 살았던 최버리는 오늘 24일 오전 6시 32분에 하늘에 계신 그분의 부르심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넜음을 가족과 친지 앞에서 공표합니다."

에스더 최(수필가)
KTVN TV Reporter 역임
중앙일보 Reporter 역임
현 버클리문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