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역사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30초, 인구 30 만명의 도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원자폭탄은 지름 71cm, 길이 3.05m 무게 4t 으로 '리틀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 히로시마는 공습 경보가 한차례 지나가고 시민들이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던 중이었다. 투하된 원폭은 오렌지 빛 섬광과 거대한 불덩이를 보였으며 도시의 60%가 파괴되었고 반경 500m 이내의 모든 생명체는 현장에서 즉사, 이후 24만명이 방사능과 고열 등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원폭 투하 후 미국은 일본에 항복을 권유했지만 일본 지도부는 항복하지 않았고 히로시마 피폭 사흘 후인 8월 9일 새벽 미 공군의 두번째 폭격기가 나가사키에 4.5톤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로 인해 1946년까지 14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이후에도 항복하지 않는 일본을 향해 추가적인 원폭 투하 요구가 높았지만 미국은 더 이상의 원폭은 투하하지 않았으며 대신 재래식 폭탄을 퍼부었고 소련 역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이후 8월15일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인해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항복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1962년 8월5일 마릴린 먼로가 사망.

미국의 배우, 모델, 가수로 활동하며 섹시 심벌의 상징이 되었던 마릴린 먼로가사망했다. 마릴린 먼로는 신경안정제인 바비튜레이트의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녀의 정확한 죽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추측이 이뤄지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발표되었지만, 우연적인 과다복용이나 타살의 가능성이 배제되지는 않았다. 마릴린 먼로는 양부모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모델 활동을 하다가 1946년 20세기 폭스 영화 출연 계약을 하면서 배우를 시작하게 되었다.

1953년 영화 '나이아가라' 가 성공한 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7년만의 외출' 등의 영화에서 코믹하며 백치 금발 미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후 더 넓은 연기를 펼치고자 연기를 배웠고 '버스 정류장' 이라는 영화로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1959 년 '뜨거운 것이 좋아' 라는 영화로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했다. 또 2009년에는 TV가이드 네트워크에서 선정한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자 배우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는 브라운관에서는 인기 스타였지만 개인적으로는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16세 첫 결혼에 실패했고 이후 야구인 조 디마지오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하고 극작가 아서밀러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의 노년은 질병이나 사적인 문제 등으로 계속 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 후에도 지금까지 대중 문화에서 마릴린 먼로는 미국의 섹시한 여배우로 인기가 이어지고 있다.

1974년 8월 8일 탄핵, 권력남용으로 말미암아 닉슨 대통력직을 사임하다.

'대통령은 법 위에 있지 않다', 미국 역사상 임기 중 대통령이 사임한 초유의 사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에 나오는 문구이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겼지만 동시에 의회와 최고재판소가 민주주의의 전통을 수호한 사건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제시한 사건이기도 하다.

워터게이트는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재선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닉슨 측이 불법적으로 상대 진영에 대한 정보활동과 선거운동 방해 공작을 하고 이를 은폐하려 했다. 워터게이트란 이 일련의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닉슨은 재임 중 중국과의 국교 수립 등 나름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는데, 그의 재선이 불확실해지자 백악관의 참모들은 비열한 방법들을 동원한다.

1972년 6월17일,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를 시도하다 실패한다. 익명의 고위관리에게 제보를 받은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이 사건을 추적하게 되고 닉슨측이 불법적인 정보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닉슨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항변했지만 점차 이사건의 은폐공작이 알려지고 여러 증언이 드러나자 결국 하원은 대통령 탄핵을 가결하게 된다. 결국 1974년 8월 4일,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에 관여했으며 사건 발생 후 연방수사국에 사건을 축소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게 된다. 8월 8일 밤 사퇴성명을 발표하고 부통령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후임 대통령인 포드가 닉슨을 사면조치 하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은 마무리 된다.

1980년 8월2일 한국에서 컬러 TV 시판 시작

대한민국의 컬러TV 시대는 1980년에 시작되었다. 컬러 TV 는 1980년 8월 2일 판매되기 시작했지만 컬러 방송은 여러 차례의 시험 방송 끝에 12월1일 부터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TV 산업은 1897년 흑백 TV발명 후 미국에서 1953년에 컬러 티비가 상용화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일본이1960년부터 컬러방송을 시작했다. 1980년대 한국은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혼란의 시기였으며 10%대의 고성장을 뒤로 10년만에 마이너스 성장에 직면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정부가 해결책으로 내놓은 방안이 컬러TV 상용화였다. 사실 우리나라의 컬러TV 는 1974년 한국 내셔날이 처음 생산했고 1977년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대규모 생산을 시작했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에서 과소비 조장과 계층 간 위화감 조성 등을 이유로 컬러TV 상용화를 반대해 왔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컬러TV 방송은 세계에서 81번째 실시된 것으로 북한보다도 6년이나 늦게 시작되었다. 1980년 12월 말 전 방송의 80% 가 컬러방송으로 바뀌면서 새롭게 시작된 컬러TV 방송 시대는 침체 되어 있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매개가 되었고 80년대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총생산 규모에도 큰 성장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