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역사
1788년 1월 2일 조지아주가 미국의 4번째 주가 되다
조지아는 1733년 최초의 13개 주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연방에 가입했다. 하지만 조지아 주가 네번째 주로 불리는 곳은 1788년 1월 2일에 미국의 헌법을 네 번째로 인준한 주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헌법에는 갑론을박이 있었고 조지아 주 내부에서도 이런 저런 논의가 있었지만 비교적 빨리 헌법을 인준한 주가 되었다. 1861년에는 연방에서 탈퇴해서 남부 연합에의 가입을 7번째로 공식 선언하였다. 남북 전쟁 중에는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 중 하나였기 때문에 철저히 북군에 의하여 파괴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조지아 주의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이후에 재건이 된 것이다. 1870년 연방에 마지막으로 재가입을 했다. 미국의 남부 지역 중에서도 동부에 위치한 이 곳은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가파른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조지아의 별명은 복숭아의 주이며 이른바 조지아 피치는 타 지역에 서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전국에서 복숭아 생산량이 가장 높은 주다. 조지아 주 출신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두말 할 것 없이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봉사활동과 자선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많은 미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마틴 루터 킹의 목사의 생가와 공부한 학교 등은 관광객들도 자주 들르는 명소다. 한인들의 인구 또한 많아서 1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1987년 1월 14일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이 경찰에 연행되어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에 의해서 사망했다. 후대에 이 사건은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라고 불려졌다. 박종철은 당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주요수배자인 박종운의 후배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체포영장도 없이 대공수사관들이 그의 하숙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다음 날인 1월 15일 사망한 채로 나오게 된다. 당시에 경찰은 “책상을 턱!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 라는 것을 공식 사인으로 언론에 발표했다. 물론 이는 거짓이었고 후에는 고문에 의한 질식사였음이 밝혀진다. 당시에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내무장관 정호용이 한 말인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라는 말도 후에 유명해졌다. 전두환 정권은 계속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고문 가담 경찰의 일부를 수감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국민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민주화운동가였던 이부영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의 폭로에 의해서 전두환 정권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점이 속속 밝혀졌고 이후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전두환정권은 상황을 타개하려고 장관급 각료 6명을 경질하는 개각까지 단행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국민의 분노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전두환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1969년 1월 18일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사건이 일어나다
1969년은 일본의 정치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1960년대 후반을 뒤덮고 있던 안보투쟁이 격화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안보투쟁이란 미국 주도의 냉전에 가담하는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에 반대하면서 일본에서 일어난 시민주도의 대규모 평화운동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운동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특히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좌파 성격의 학생들이 무력 투쟁을 전개했다. 1968년부터 도쿄대에서도 이러한 투쟁은 격화되었는데 특히 의학부 학생들이 투쟁을 시작하면서 도쿄대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인 야스다 강당을 점거해버렸다. 이떄가 3월 27일이었다. 경찰력이 투입되었지만 학생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결국 도쿄대 전학부의 학생 파업이 일어났다, 결국은 강력한 경찰력의 투입만이 학생들의 파업을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의견이 대두되었고 경시청 경비부는 8개 기동대를 동원하하여 시설 봉쇄 해제에 나서게된다. 봉쇄 해제가 시작된 날이 바로 1969년 1월 18일이었다. 오전 7시경부터 도서관 등의 바리케이드 철거를 시작했고 학생들은 돌을 던지거나 화염병을 던지면서 저항했다. 경찰은 이러한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설 봉쇄를 하나씩 해제했고 오후 1시경에는 야스다강당의 봉쇄 해제가 시작되었다. 야스다 강당을 지키는 학생들의 저항 때문에 기동대가 고전해서 작업은 중지되었다. 다음날인 오전 6시 30분 다시 강당에 진입을 시도했고 결국 학생 90여 명을 검거하면서 도쿄대 야스다 강당 봉쇄 해제는 완료되었다.
1903년 1월13일 한인 미주 이민의 시작
최초의 한인 이민선 ‘갤릭(Gaelic)호’ 가 101명의 한인 이민자들과 통역인을 태우고 1903년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 미주 한인이민의 그 시작을 알렸다.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최초로 호놀룰루에 간 한국인은 1899년 신의주 출신의 인삼 상인들인 최동순, 장승봉, 강군철, 이재실, 박성근 등이었는데 이들은 당시 중국인으로 분류가 되었고 한국 민간인으로 하와이 이민국에 기록된 첫번째 입국자는 1900년 1월 15일에 상륙한 양백인, 김일수 두 사람이었다. 1905년까지 한인 이민자는 총 7,226명으로 이들은 대부분 노동력이 부족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으며 자녀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또 조선사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던 개국진취운동의 영향이 이민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하와이 이민은 수민원에서 발행한 여권인 집조를 가지고 노동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진 첫 해외 이민이었다. 1902년 12월22일 제물포에서 121명의 이민자를 태운 한국 역사상 첫 공식 이민선은 눈물속에 미지의 땅 하와이를 향해 출발했으며 일본 고베에 도착하여 신체 검사를 통해 최종 101명이 통역원과 함께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20일의 행해 끝에 호놀룰루에 도착하게 되었다. 당시 이민자들은 3년간 일하는 조건으로 하루 품삯은 50-80센트 (쌀 10kg이 1달러) 였으며 고된 노동과 정신적 고통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인 미주 이민의 첫 역사가 된 이들의 개척은 미주 한인 사회 건설과 조국 광복 운동의 주춧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