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역사

KAL 007기 소련기에 피격, 탑승자 269명 전원 사망

1983년 9월1일 새벽 3시26분 뉴욕발 서울행 KAL KE 007이 사할린 인접 해역 1만m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 수호 15기가 발사한 공대공 미사일 2발에 격추 당했다. 당시 비행기에는 승객 246명과 승무원 23명, 총 269명이 타고 있었으며 전원 사망했으며 사고 후 수색 작업에 총력을 기했지만 단 한 구의 시신도 회수하지 못했다. 당시 KAL 기는 예정 항로보다 북쪽으로 이탈한 채 5시간을 비행중이었다. 사고 후 소련은 격추 사실을 부인했다가 미국이 감청 녹음을 공개하면서 소련의 격추 행각이 밝혀졌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이 대한항공 보잉기를 소련 공해에 침범하게 했으며 이것이 승객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라며 책임을 미국에 전가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심각한 냉전 중이었다. 때문에 소련은 철저한 확인도 없이 KAL 기를 자국 영공을 침투한 미국의 정찰기로 오인해 격추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1983년 9월7일 서울 운동장에서는 유가족을 포함 사회단체, 시민과 학생 등 약 10만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추락 희생된 KAL 여객기 탑승자 합동 위령제가 열렸으며 위령제가 끝나고 규탄대회를 열어 소련이 저지른 비인도적 만행에 대해 모든 국가와 국제 기구가 신속하고 단호하게 응징할 것을 촉구했다.

1796년 9월 10일 수원 화성이 완공되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다. 조선의 왕 정조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정치를 펼쳐 나갔는데 수원 화성 건축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수원 화성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려고 했다. 심지어는 수원으로 천도를 하려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서 세운이 화성은 동양에서 가장 정교한 성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정조가 이 성을 만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의 이장이었다. 화성 건설에 중추적인 맡은 인물은 정약용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정약용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그 총애에 답했다. 화성이 이채로운 점 중 하나는 군사적인 기능이 매우 잘 적용되어 있다는 것. 실제로 화성의 영어명칭에는 요새라는 포트리스가 들어가 있다. 공식명칭은 Hwaseong Fortress다. 먼거리에서 성벽의 작은 간이 출입구가 잘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는 점 등에서 군사적인 목적이 잘 드러난다. 이렇게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서 지어진 화성은 한국전쟁 당시에 미군과 북한군 등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그 이전에도 일본에 의해 반 해체된 상태였다. 하지만 화성성역의 궤가 온전히 남아있어 완벽하게 복원이 가능했다. 완벽한 복원을 했기 때문에 세계유산 으로도 지정될 수 있었다.

1991년 9월 17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에 가입하다.

1991년 유엔본부에 태극기 휘날렸다. 오랜 숙원인 유엔 가입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대한민국(이하 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의 가입승인이 159개 유엔 회원국 만장일치로 성사됐고 뉴욕에 위치한 유엔본부 앞 광장에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자리하게 된다.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지 근 반세기가 흐른후에야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공식 인정을 받은 것이다. 남한은 1948년 제3차 유엔총회에서 합법 정부로 승인 받은후 여러 차례 시도를 했으나 상임이사국인 소비에트 연방의 거부로 유엔 가입이 번번히 좌절됐었다. 북한은 1949년 2월 가입 신청을 했지만 협조하는 나라가 적어 심사조차 거부당했다.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의 동시 유엔가입이 이루어졌고 이는 '어느 쪽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냐?'는 정통성 시비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소모적 대결이 줄고 평화정착을 위한 명분이 갖춰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단, 각각의 국가로 인정됨에 따라 '한민족 두개 나라' 라는 아픈 현실이 국제사회에 공식화 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남북한 모두 유엔 별도 가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남북의 분단이 고착화 될 수 있기 때문이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 암묵적 원칙을 먼저 깬 것은 남한정부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3년 6-23 선언을 통해서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현실화되는데, 노태우 전대통령은 1991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남북 동시 가입이 안되면 단독 가입이라도 하겠다"며 연내 유엔가입을 천명하게 된다. 이를 '반민족적 범죄'라며 비난하던 북한은 5월 '남북한 단일의석 가입 입장을 철회한다"고 공식 발표한다. 이후 북한은 7월, 남한은 9월에 신청서를 각각 제출하게 되고 신청 순서에 따라 북한은 160번째, 남한은 161번째 유엔 회원국이 됐다.

1988년 9월 서울에서 제24회 하계 올림픽이 개막하다.

서울 올림픽은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동안 열렸으며 IOC 회원국 160개국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었다. 당시 개최 후보국은 한국과 일본이었고 투표결과 52대27로 우리나라 서울이 개최국이 되었다. 88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금메달12개 동메달 10개 은메달 11개 총 33개의 메달을 따며 종합 4위의 성적을 올렸다. 88 서울 올림픽에서는 태권도가 처음으로 시범 종목이 되었고, 그동안 대한민국과 교류가 없던 공산 국가와의 관계가 이 대회로 인해 급속도로 개선 되었다. 88올림픽 이후 한국은 경제 발전은 일본보다 높이 평가되었다. 투자뿐 아니라 수출 또한 올랐으며 유럽 내 한국의 가전 제품이 80% 이상 현지 생산을 하게 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에게 가난에 찌들고 위험한 나라라는 오해를 받고 있던 한국은 올림픽을 통해 동유럽 국가들에게 한국의 발전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동유럽 국가들과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발전했다.